
7월 12~14일, 2박3일간 대마도로 여행을 다녀왔다. 예정에 없던 여행이었기에 다소 허둥대며 부랴부랴 채비를 해서 다녀왔던 여행이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첫 해외여행이기도 했다.
대마도 여행 준비에 앞서, 먼저 대마도라는 섬에 대해서 간략하게라도 짚고 넘어가야겠다.
대마도 개관
대마도는 일본에서는 対馬(つしま)라고 하고, 한글로는 쓰시마로 표기한다. 섬의 총면적은 약 700㎢(708.5㎢)이며, 인구는 2015년 기준으로 32,590명이 살고 있는 곳이다.
한국의 주요 섬들과 비교를 해 본다면,
| 쓰시마 | 제주도 | 거제도 | 울릉도 | 독도 |
면적(㎢) | 708.5 | 1,845.88 | 380.1 | 72.86 | 0.187 |
인구(명) | 32,590 | 624,394 | 255,828 | 10,153 | ≒ 50 |
면적대비 | 1 | 2.6 | 0.5 | 0.1 | 0.02 |
인구대비 | 1 | 19.2 | 7.8 | 0.3 | 0.001 |
(인구통계는 통일성을 위해서 2015년도 통계자료를 사용하였다.)
보통 대마도 가이드 분들의 설명으로는 울릉도와 비교를 해서 설명을 자주 한다. 보시다시피 대마도는 울릉도에 비해서 면적은 10배에 달하지만, 인구는 3배 밖에 많지 않다. 게다가 면적의 8-90%가 산지에 해당하기에, 기실 한국에 비해서 조용한 시골 섬마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도 그런 느낌을 무척이나 받을 수 있었다.)
<대마도와 한국/ 대마도와 부산간 거리 비교>
부산과는 대략 45km정도, 일본과는 가장 가까운 섬인 이키(壱岐)섬이 48km, 일본 본토로는 후쿠오카 170km, 나가사키가 208km 정도 떨어져 있어서 거리상으로는 일본 본토보다는 부산과 더 가까운 곳이다.
대마도의 역사
역사적으로 대마도를 떠올리면 우리는 조선 세종 시기에 있었던 대마도정벌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대마도에 대한 우리의 기록은 삼국시대에도 찾아볼 수 있다. 삼국시대 초기 한반도에서는 대마도를 ‘진도(津島)’라고 불렸으며, 한반도와 가장 가까운 지리적 조건으로 인해 대륙으로부터 석기를 비롯해 청동기문화, 벼농사, 불교 및 한자 등을 일본으로 전달하는 통로 역할을 한 섬이었다. 본디 대마도는 아비루(阿比留) 가문이 관리하고 있었으나, 12세기에 아비루 가문에서 일어난 반란을 고레무네노 시게히사(惟宗重尙)가 진압하면서 이후 그의 후손인 소(宗)씨 가문이 대마도를 지배하게 되었다. 이후 고려와 조선으로부터 관작을 받음과 동시에 쇼군으로부터 다이묘(大名)로 임명되는 등 한국과 일본 사이에서 양속관계를 유지했다.
<대마도 정벌도>(사진출처 : 사단법인 세종대왕 기념사업회)
대마도 정벌
우리에게 잘 알려진 대마도 정벌은 기실 13세기에서 16세기 사이에 3차에 걸쳐서 이루어졌다. 당시 대마도는 한반도와 중국을 오가며 노략질을 해 대는 왜구의 본거지였다. 그리하여 처음 정벌이 있었던 것은 바로 고려 때의 일로, 1389년(창왕 2년)에 박위가 군선 백 여 척을 이끌고 대마도를 토벌했다. 2차 대마도 정벌은 조선 초인 1396년(태조 5년)에 이루어졌다.
가장 잘 알려진 세종 시기의 정벌은 3차 대마도 정벌로, 기해동정(己亥東征)이라고도 한다. 1418년 대마도에 큰 흉년이 들게 되면서 식량이 부족하게 되었다. 아울러 대마도주인 소 사다시게(宗貞茂)가 죽고 아들인 소 사다모리(宗貞盛)가 대마도주에 뒤를 잇게 되었다. 그는 이 시급한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명나라의 해안 지역 침략을 감행하였는데, 이 노정 가운데 조선의 비인(庇仁; 현재 충남 서천군)·해주(海州) 지역 해안을 약탈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1419년(세종 1년) 음력 6월에 이종무를 삼군 도체찰사로 임명하여 경상·전라·충청 3도에 있는 군선 227척과 병사 1만7,285 명을 거느리고 원정을 떠나도록 명했다. (그러나 사실 세종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기에, 실제로 명령을 내린 이는 상왕의 역할을 하고 있던 태종 이방원이었다. 그는 세종이 즉위한 후에도 한동안 군사권을 내어주지 않고 직접 결정하고 있었다.)
6월 19일, 이종무는 거제도 남쪽 주원방포를 출발해 다음날 20일에 대마도에 도착했다. 그는 도주 소 사다모리에게 항복을 권고하였으나 대답이 없자 왜구를 수색하기 시작했다. 당시 왜구들은 정찰선단을 왜구선단으로 착각해 환영연회를 준비하다가 이종무의 본대를 보고 급히 산악지역으로 대피한 상태였다. 조선 정벌군은 이에 왜구를 수색하여 적선 129척을 나포하고 가옥 1천939채를 불살랐으며 왜구 114명을 사살하였다. 그러나 본격적인 상륙작전에서 왜구의 반격을 받아 100여명이 사상하는 피해가 발생했고, 이에 따라 대마도 해상을 봉쇄하는 전략으로 변경했다. 하지만 당시 65일치의 군량만을 보유하고 있던 데다가, 태풍의 우려로 인해서 20일 만에 결국 이종무는 뱃머리를 조선으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다시금 2차 정벌을 준비하려 했으나 내부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기에 쉽지가 않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당시 병조판서였던 조망생 명의의 서신을 대마도주에게 보내어 '조선을 군신(君臣)의 예'로 섬긴다면 정벌을 중단할 수 있다고 통보함과 더불어 그 해 9월과 10월에 각각 군선 정비를 지시하는 내용을 각도에 하달하면서 대마도주를 압박했다. 결국 압박에 위기감을 느낀 대마도주는 도이단도로(都伊端都老)에게 신서(信書)를 보내 항복의 뜻을 전했다. 대마도주는 신하의 예로서 섬길 것을 맹세하고 경상도의 일부로서 복속하기를 청하였으며, 스스로 왜구를 스스로 단속하고, 조선에 대하여 조공을 바칠 것을 약속했다.
이렇듯 3차 대마도 정벌은 원정기간 동안 180여 명의 조선군이 전사하는 등 많은 희생이 따랐던 것으로, 비록 군사적인 승리는 거두지 못했으나 외교적인 승리를 거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대마도는 한국인들에게 친숙하며 한국의 역사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곳이다. 지금도 섬나라의 정신 나간 우끼끼들은 여전히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겨대는 중이지만, 특히 2008년 일본 정부가 중학 교과서에 독도를 자국 영토로 주장하기로 하면서 한 때 우리는 대마도 영유권을 주장하자는 이야기도 제기되었다. 무려 그것도 국회에서! 당시 한나라당 최고위원 중 허태열 의원을 중심으로 일부 국회의원들이 모임을 갖고서 2010년에 공식적으로 <대마도 포럼>을 출범하기까지 했다. 한편,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수구적인 발상이며, 현재 명백한 일본 영토를 우리 영토로 주장하는 것은 오히려 독도 영유권 주장에 대한 국제사회의 신뢰까지 잃을 수 있다는 지적도 제기되었다. (그러나 출범이후 7년이 지난 지금까지 별다른 활동이 없는 것으로 봐서는... 뭐... ) 개인적으로도 여행 동안에 ‘일본이 독도로 우겨대면 우리는 역으로 대마도 영유권을 우겨대는 것은 어떨까?“라는 생각은 안 해본 것은 아니지만, 실제로 그렇게 대응한다면 아무래도 국제사회에 대한 독도영유권의 문제에 있어서도 우리의 입지와 신뢰가 위험해질 것만 같다. (모르지.. 누구들처럼 최소 수십 년간 자료를 축적해서 주도면밀하게 준비를 한다면 조금 복잡해 질 수는.. 그렇다고 해서 정말 우리 영토가 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이지만 말이다.)
[참고문헌]
1. 한국사콘텐츠, “대마도 정벌 : 왜구의 뿌리를 뽑다”,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12)
2. 《세종실록》 세종원년 6월 9일.
3. 위키백과, 대마도 정벌
(https://ko.wikipedia.org/wiki/%EB%8C%80%EB%A7%88%EB%8F%84_%EC%A0%95%EB%B2%8C)
4. 오마이뉴스, “대마도는 조선 땅이다”, 2007-12-01
5. 한겨레, “조선의 1419년 대마도 정벌은 ‘실패한 전쟁’, 2006-10-17.
6. 사단법인 세종대왕기념사업회, 《대마도정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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